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페트라와 사해가 유명한 요르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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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역사

페트라와 사해가 유명한 요르단의 역사

by 우지랄소 2023.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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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은 서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국가이다. 
수도는 암만, 국경은 이라크,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와 접해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행해졌고 국토는 구석기시대부터 정착했다 기원전 13세기 경 이집트인들이 정착했고 기원전 1세기경에는 남부 페트라를 남긴 나바테아 왕국이 발전했고 1~2세기에는 로마제국이 통치했다
나바테아는 기원전 2세기 초 요르단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한 원주민을 나바테아인이라고 불렸다. 
나바테아 왕국은 페트라를 만들었고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이집트 왕조의 세력권에 있었고 312년 알렉산드로 대왕과 강력한 항전을 했고 그 이후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7세기경에는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기 전까지 이슬람 제국 지배에 있었고 그때 아랍화, 이슬람화가 되었고 이슬람세계의 중심이 시리아에서 점점 멀어지자 도시 문명이 쇠퇴해져 갔음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로부터 도망온 사람들을 통해서 지역활기가 생겼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의통치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현재 요르단의 국명을 만들게 되었다. 
요르단도 중동전쟁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 영토를 빼앗긴 나라 중 하나이며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팔레스타인이 대거 유입됐다. 

19세기부터 도망온 사람들을 통해 내수시장이 활성화가 되어가듯 각국의 내전으로부터 피해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내수시장이 증가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대중 요약을 마무리하고 자세히 알아보자 
석기시대는 기원전 8500 ~ 4500년으로  인간의 활동한 유적이 발견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 이며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손도끼, 부싯돌과 같은 도구들이 발견됐다. 이 시기에 기후변화로 인해서 정착패턴이 바뀌었고 사막에는 건조한 바람과 따뜻한 기온으로 인해서 사람이 일 년 내내 살 수 없게 됐다.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회반죽으로 만든 조각상을 만들어져 있는 것이 현재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동기시대는 기원전 4500년 ~ 3200년으로 구리로 화살촉, 갈고리, 도끼를 만들었고 농경업보다는 축산업이 더 활발했다 사막이 많은 지역이다 보니 기후로 인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툴레이타트 가술은 요르단 계곡에 위치한 큰 동기 시대 마을이다. 그 집의 벽은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고, 지붕은 나무와 갈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것들은 석조 토대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것들은 큰 중앙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벽에는 종종 복면을 한 남자, 별, 기하학적 모티브의 밝은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종교적인 믿음과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3200년~ 1950년으로 습격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부터 기반시설들이 만들어져 있었고 아라바에서 고고학자 들은 방이 있는 집뿐만 아니라 갱도 무덤을 발견했다. 
문자는 기원전 1900년대부터 썻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에서 문자가 기원전 3000년에 개발됐지만 수천 년 정도 지나서야 쓰이기 시작했다.
이주가 많아지고 무역을 많이 시작하면서 다른 문명들의 문화들을 많이 확산됬다. 청동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칼, 다른 무기들을 만들게 되었고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목민인 베두인이 살았다. 
수도 암만에는 새로운 요새가 나타났고 흙으로 만든 성벽과 비탈을 만들어 등반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망루를 지어 적들의 침입을  방지했다. 

중세 청동기 시대 이후의 이 지역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는 북쪽의 길르앗, 요르단 중부의 모압, 남쪽의 미디안과 같은 왕국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요르단 남부의 에돔을 통과하려고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모 했고 
그들은 처음에 아모리 민족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나중에 패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과 루벤의 이스라엘 부족과 므낫세 그룹의 절반이 암몬 족, 아모리 족, 바샨 족의 정복된 영토에 정착했고, 그들이 부분적으로 파괴한 많은 성읍들을 재건했습니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1868년에 더반에서 발견된 메사(또는 모아비트) 돌인데, 이 돌은 히브리인과 비슷한 가나안 사람의 동쪽 형태로 새겨져 있습니다.

다음 몇 세기(기원전 1,300년–1,000년)는 요르단 강 양쪽에서 끊임없이 쳐들어온 공격이 있었고 다윗은 모압과 에돔을 공격하여 초토화시켰습니다. 비록 잠시 동안 지배되었지만, 암몬은 다윗의 죽음으로 수도인 랍바스 암몬 (현대의 암만)과 함께 독립을 되찾았습니다 (기원전 960년경). 솔로몬은 에지온게베르 (현대의 이스라엘 엘랏)의 아카바 만에 항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와디 알 ʿ 아라바의 광산들에서 구리 광석을 제련하여 아라비아 남부의 주들과 교역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에돔 사이에는 적대감이 끊이지 않았고, 히브리 왕 아마 지아는 심지어 수도인 셀라 (페트라)를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아다드니라리 3세 (811/810–783 BCE) 치하의 아시리아 인들인데, 그들은 나라의 동쪽 부분을 에돔까지 지배했습니다. 760년대와 750년대에 아시리아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734–733년에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재위: 기원전 745–727 BCE)에 의해 나라가 탈환되었고, 그 후 이스라엘을 황폐화시키고, 백성들을 추방하고, 나라를 아시리아 총독들의 통치하에 있는 지방들로 나누었습니다. 이 직접 통치 정책은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시리아 문헌은 그 당시 에돔의 남쪽과 동쪽 땅을 점령했던 나바타이아인을 언급한 첫 번째 자료입니다. 아시리아가 멸망한 후, 모아브인과 암몬인은 유다를 계속 공격하다가 느부카드레자르 2세 치하의 신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신 바빌로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통치했던 요르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시기에 나바타이아인들은 에돔에 잠입하여 에돔 인들을 팔레스타인 남부로 몰아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번성하고 교역이 증가하며 새로운 도시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랍바스 암몬은 필라델피아로 이름이 바뀌었고, 자라시는 안티오키아 온 더 크라이소르호아스, 즉 게라사가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의 적대는 나바타이아인들이 그들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하고, 아라비아와 시리아와의 캐러밴 무역을 바탕으로 그들의 번영을 증대시킬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요르단의 북부 지역은 한동안 유대인들의 손에 있었고, 유대인 마카베아인들과 셀레우코스 왕조 사이에 끊임없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의 대부분은 이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트란스요르단 토후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된 이후 튀르키예는 1차세계대전 중 아랍반란의 군대가 베두인, 체르케스인,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요르단을 점령하면서 튀르키예 지배는 끝났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국제 연맹과 점령한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서 경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되고 트란스요르단 영토는 문서가 만들어지기 전에 압둘라에게 할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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